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다 다케오 (문단 편집) === 총리 재임 시절 ===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67.jpg]] 1976년 12월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썩 좋지는 않았다. [[보수방류|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지라 우익적 성향을 가진 후쿠다였던 탓에 당내는 물론 [[진보]] 성향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라기 보다는 계파간의 밀약으로 총리가 된 탓에 신선미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 71세인 고령의 나이 탓에 과연 총리를 잘할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어린 시각도 있었다. 이런 우려를 후쿠다는 "나는 메이지 38세"라고 말하면서 젊음을 어필했는데 후쿠다가 태어난 해가 메이지 38년이라 이런 어필을 했다. 그리고 오히라를 당 간사장에 임명하고 오히라파를 입각시켜서 당내 안정을 도모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라서 197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50석대 정도를 확보해서 참패하고 참의원이 여야백중에서 자민당이 소수여당으로 전락하는 여소야대로 변모해서 총리에서 조기퇴진할것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때마침 내분이 일던 사회당에서 일부계파가 탈당하며 사회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따로 차리며 세력이 누수되며, 당초 예상보다는 선전하며 의석을 유지할수있었고,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당 밖에 지원조직인 '자유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우익 작곡가 이즈미 도시로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07000601.jpg|width=100%]]}}}|| || 총리 첫 해인 1976년 2월 6일 식사시간 중. [[소바|메밀국수]]는 후쿠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07000596.jpg|width=100%]]}}}|| || 총리 첫 해인 1976년 2월 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 그해 9월 28일, [[적군파]]가 일본항공의 여객기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다카 일본항공기 납치사건]]) 이때 적군파는 몸값 600만 달러와 적군파 6명의 죄수석방을 하지 않으면 [[미국인]] 인질부터 살해하겠다고 협박했고, 후쿠다는 '''"사람의 목숨은 지구보다 더 무겁다"'''라고 말하면서 이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후쿠다의 이런 조치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려서 결국 더 많은 테러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미국인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한때 이로 인해 떨어졌던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재임중에 회복되었고 후쿠다는 중국과의 외교정상화와 적극적인 동남아시아 외교를 전개했다. 이는 [[마닐라]]에서 발표한 후쿠다 독트린으로 나타나게 된다. 1978년에는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중일 평화우호조약'의 조인식을 가지게 된다. 당내 파벌정치의 해소를 목적으로 당원들이 참여하는 총재 예비투표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약속대로 2년이 지나 이제 밀약대로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어야 했지만 후쿠다는 '''"세계가 후쿠다를 원한다"''' 라면서 재선도전을 선언해버렸다. 이에 뿔이난 오히라는 다나카와 연대했고 후쿠다가 자신을 언제 쳐낼지 몰라 불안해하던 다나카는 오히라를 총리로 만들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 총재 예비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당원명부는 비공개가 원칙이었으나, 다나카는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이 '''비공개 당원명부를 빼돌리게'''한 다음 자신의 조직을 풀가동해 당원들과 1:1로 접촉하면서 오히라 지지를 호소했다.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데에는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세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예비선거의 초반에는 후쿠다가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쿠다는 당내 파벌해소라는 명분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나카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고 방심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결국 여론조사와는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오히라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그래도 말 그대로 예비선거에 불과했던 탓에 후쿠다파의 소장파 의원들인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두 사람은 당시 불혹밖에 안 된 젊은 나이였다.]은 본선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이미 이전에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후보는 본선에 나가면 안되지 않나?"'''라고 말을 뱉어버린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결국 후쿠다는 "민심은 곧 천심이라지만 '''가끔 천심 중에도 이상한 천심은 있는 모양입니다.''' 패장은 군사를 논하지 않는 법이지요."라고 말하며 본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후쿠다가 본선 출마를 포기한 데에는 억지를 쓰고 본선에 출마해도 결국 국회의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본선에서는 다나카의 입김으로 패할것이 뻔하기 때문에 추한꼴이 되기 전에 깨끗이 물러난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만약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깨지 않았다면 이후 다나카 천하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